하회마을에 대해서
관련링크
본문
|
| ||||||||||
|
| ||||||||||
|
| ||||||||||
|
| ||||||||||
|
|
| |||||||||
|
| ||||||||||
|
[기타시설] [중요시설] | ||||||||||
|
| ||||||||||
|
하회(河回)란 이름은 물이 돈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하며 1980년 12월 31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23호로 지정되고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자료 제 122호로 변경 지정된 마을로서 가장 한국적인 옛 모습과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선비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보고자했던 영국 여왕은 하회마을을 찾았다. (1999년 4월 21일) 엘리자벳 여왕이 하회마을을 다녀간 후로는....온 세계가 새롭게 주목하였고 세계각지에서 하회마을을 보고자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다. 일반 관광객들, 논문자료를 얻기 위해 혹은 학술연구 차, 또는 수학 여행으로 들르는 학생들로 하회마을은 늘 사람들로 북적댄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오늘도 과거와 현재를 한마당에 펼쳐놓고 수많은 관광객들과 함께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회마을은 안동에서 서쪽으로 50리 거리에 있으며 안동 시내에서 버스로 약 40분 걸린다. 동쪽으로는 태백산맥인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평지에서 높다랗게 솟아 있고, 남쪽에는 일월산맥인 남산(南山)과 서쪽으로는 화산 너머로 역시 일월산맥인 원지산(遠志山)이 나즉하게 뻗어 있으며 그 뒤로는 마늘봉(峯)이 드리워져 있다. 마늘봉은 그 생김새가 마치 마늘과 같다는 데서 생겨난 이름이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한편으로는 만은봉(晩隱峯)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봉우리는 하회 남산 뒷편에 뽀족하게 모습을 드러낸 마늘봉이며 달리는 문필봉(文筆峯)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마을의 인재배출과도 무관치 않은 문필봉이라는 연상 때문인지 더욱 정겹다. 마을 사람들은 일월산 지맥인 남산을 감투봉이라고도 부른다. 낙동강이 동에서 흘러 서쪽에서 다시 북쪽으로 구비쳐 마을을 안고 돌아 흘러 하회(河回) 라고 불리워 왔다. '물도리동' 이라 하는데, 다른 말들은 하회(河廻), 곡강(曲江), 하상(河上), 강촌(江村), 하촌(河村) 등으로도 불리워졌다. 시성 두보(杜甫)의 시에 나오는 '청강일 곡포촌류(淸江一曲抱村流)'를 줄여서 표현한 눈에 선 한 마을이다. 하회마을의 모둠살이는 낮은 구렁 형태의 골을 따라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완만한 자연경사와 삼면을 감싸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로 인해 동서남북으로 좌향을 제각기 잡고 있어 여느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가옥배치를 보여준다. 마을의 주택 좌향을 '제각기'나 '동서남북 사방'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더욱 적절한 표현은 '24방위'일 것이다. 학문이 있고 문화를 아는 사람들이 무수히 배출된 양반마을, 하회이므로 학문과 문화적 안목을 바탕으로 한 자연과의 조화가 그것이다. 그 조화가 각양 각색의 가옥의 좌향과 형태의 구조를 결정했다고 본다. 삼면을 감싸 흐르는 강을 바라보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마을 안에는 웅장한 고기와집과 솟을대문 그리고 정감 어린 초가집들이 지어져 전통마을로손색이 없는 풍산(豊山) 류씨(柳氏) 총본산일 뿐 아니라 강산의 수려함으로도 국내의 제일이다. | ||||||||||
|
| ||||||||||
|
고려말에 정승을 지내던 김해(金海) 허씨(許氏) 한 분이 조정에서 물러나 팔도의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다. 안동을 경유하게 되었다. 하회의 터가 너무나 좋은 나머지 웃골 거먹실(남산팔선대 맞은편 지역)에 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강 건너 건짓골(乾池谷)에 허정승의묘소가 있어 자손인 김해 허씨들이 묘소를 찾아왔었다. 하회탈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허도령역시 김해 허씨이다. 허씨들이 터를 잡고 산지 백년 뒤 광주(廣州) 안씨(安氏) 안성이란 분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각 고을을 순시하던 중 하회에 와서 보니 산수가 너무나 좋아 화산 기슭 향교골에 터를잡아 살기 시작했다. 천곡(泉谷) 안성(安省)이란 분의 아들 안종생(安從生)은 사헌부 감찰까지 지냈는데 배소(裵素)의 사위이기도 하다. '광주안씨대동보'에 의하면 안성은 전서공(典書公, 류종혜)과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에 전서공이 고개 밖(峴外)에 터를 잡던 시기와 같은 때에 하회에 와서 살기 시작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안씨는 하회에 들어와 35대까지 내려왔다. 는 것만 보아도 그 역사가 유구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마을 근처에 안씨 묘소들이 산재해 있으며 삼십년 전까지 한 집이 남아있다가 떠난 뒤로 지금은 한집도 남지 않았다. '안씨들이 피를 천석이나 했다'는 말도 전한다. 부용대로부터 부계(富溪)쪽으로 만여평이나 광활하게 펼쳐진 농토에서 수확된 것으로 추정된다.풍산 류씨들이 입촌하여 점차로 번성하게 되자 허씨들이 먼저 한 두집 떠나고 이어서 광주안씨들이 뒤를 이었다. 그리하여 하회마을은 류씨 집성촌으로 잡으면서 얼마 안되어 벼슬길이 열렸다. 중종대에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1515~1573)은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고, 이분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바로 겸암 류운룡(1539~1601)과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이다. 하회는 옛부터 삼백여 대촌(大村)이라 불려왔다. 이것은 하회 1, 2등을 합해서 부른 말이다. 갑술년(1934)대홍수에 유실되어 현지는 본동에 120여호에 류씨는 70여호 정도이다. 지금 하회마을을 이루고 사는 류씨들은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아서 본(本)이 풍산(豊山)이다. 고려말 호장을 지낸 휘 절(節)을 시조로 하는데 7세 공조전서(工曹典書) 류종혜(柳宗惠)공이 화산에 세 번(가장 가물 때, 홍수때, 평년에)이나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등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지금의 양진당에 집을 짓기로 결정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마을 터는 늪이어서 일견 마을 터로서는 적합지 않았다. 그러나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형상으로 명당이라고 하지만 부용대 위에서 하회마을을 내려다 보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보이니 연꽃은 수면에 닿을락 말락 해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법이어서 허씨나 안씨들의 터는 물에서 너무 높아서좋은터가 아니니 계란으로 말하자면 허씨들은 흰자위 부분에, 안씨들은 노른자 부분에 해당되고 양진당 터는 계란의 배반 (병아리씨눈)에 해당되는 곳이기에 택했다고 전해진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11-27 22:39:00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이동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