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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님, '하나님의 침묵' 이 아닐까요?

본문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조용기 목사님, '하나님의 침묵' 이 아닐까요?

htm_20110324010523a000a010-001.JPG #풍경1: 동일본에서 대지진 사태가 터졌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는
“일본 국민의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인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발언을 접한 많은 크리스천이 분노하더군요.
“왜 하나님을 거기에 갖다 붙이는가.
그런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하나님이 아닌가”
“그럼 쓰나미로 목숨을 잃은 일본의 기독교인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한동안 시끌시끌했습니다. 조 목사처럼 ‘하나님의 경고’란 말을 밖으로 내뱉진 않지만 속으로는 그런 시각에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천도 있을 겁니다.

  #풍경2: 정용섭(대구 성서아카데미 원장) 목사는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는 목사입니다.
예전에 인터뷰할 때 ‘하나님의 침묵’을 이야기하더군요.
“기도를 한다고 다 되지 않는다. 성서에는 기도를 했는데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그게 ‘하나님의 침묵’이다. 이것이 성서에 담겨 있는 가장 깊이 있는 영성이다.” 정 목사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더군요.
누구는 ‘하나님의 경고’를 말하고, 누구는 ‘하나님의 침묵’을 말합니다.

  #풍경3: ‘현문우답’은 최근 유럽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했습니다.
거기서 중세의 가톨릭을 봤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더군요.
중세의 교회는 “예수로 돌아가자, 성서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개신교도를 불에 태워서, 혹은 물에 끓여서 죽였습니다.
스위스 취리히의 개신교회 지하실 벽에는 당시의 처참한 학살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더군요. 중세의 가톨릭은 그걸 ‘하느님의 경고’라고 여겼겠죠.

  그럼 현대의 가톨릭은 어떨까요.
교황청부터 내려오는 거대한 수직적 조직체계에도 불구하고 꽤 유연한 편입니다.
이웃종교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죠. 선교 방식은 공격적이지도, 배타적이지도 않습니다.
가톨릭 신부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런 답을 하더군요.

  “중세 때 교회는 천동설(天動說)을 믿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을 중심으로 별들이 돈다고 믿었다.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단이었다. 알고 보니 천동설이 틀렸더라.
그게 과학적 사실이었다. 가톨릭 교회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중세의 교회는 많은 오류를 범했다. 그래서 가톨릭은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하느님은 오류가 없으신 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지금 이 순간에도 틀릴 수 있다.’ 그렇게 오류를 범했던 ‘중세의 DNA(유전자)’가 가톨릭의 몸에는 지금도 흐른다.
그게 현대 가톨릭 신앙의 전제가 됐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경고’와 ‘하나님의 침묵’이 보입니다.
현대 가톨릭이 공유하는 “나의 신앙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출발점은 단순한 종교적 자세나 겸손한 태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만날 건가” “그리스도를 향해서 어떻게 걸어갈 건가”에 대한 나침반이 담겨 있습니다.

  봄날의 꽃, 여름의 소나기, 가을의 낙엽, 겨울의 눈발에도
하나님(하느님)의 뜻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상과 이 우주는 신의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봄날의 꽃도, 여름의 소나기도, 가을날의 낙엽도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곡되기 십상입니다. 많은 이가
‘하나님의 침묵’을 나의 눈, 나의 입, 나의 생각에다 갖다 붙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뜻’이라고 왜곡합니다.
인류사에는 ‘신의 뜻’이라며 행해진 숱한 ‘나의 뜻’이 있습니다.
중세의 가톨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의 경고’라며 행해진 숱한 ‘나의 경고’가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침묵’을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침묵 속에 신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내 눈과 내 입, 내 생각을 통해선 침묵이 풀리지 않습니다.
일본 대지진을 향해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하는 나의 눈, 나의 입, 나의 생각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침묵’이 풀리지 않을까요.


박칼린 음악감독이 직접 선곡한 감동의 음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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