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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에 대한 이해

본문

방언에 대한 이해



우리는 방언을 비롯해서 모든 은사에 대해서 심각할 정도로 무지하거나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영적인 지식이 부족하고 이것을 연구하고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없어도 교회는 제도와 틀에 의해서 잘 유지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에 대한 신학적 연구는 근래에 와서 다루어지기 시작했으며,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인해서 은사를 받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은사는 주어진 것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사용할 때 더욱 강력해지고 풍성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았다고 해도 개발하지 않으면 곧 소멸되고 맙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생 시절에 또는 평신도 시절에 은사를 받았지만 신학을 공부하는 세월동안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고 묵혀 두었기 때문에 위축되고 소멸되어 버렸지만 그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으로 무장되었으며, 은사는 보조적이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오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말합니다.

따라서 은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은사란 일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며,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그 일을 할 수 없거나 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신령한 은사와 능력을 우리는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는 주신 분의 뜻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그 일을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는 은사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의 은사’ ‘신유의 은사’ ‘기적 행하는 은사’ ‘예언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등이 있습니다. 이 아홉 가지 은사는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지 못해도 병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으며, 병이 고침을 받습니다. 신유의 은사가 없다고 해서 병자를 위한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은사가 없다고 해서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어떤 시련도 이기며,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은사가 없다고 해서 믿고 행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영을 분별하는 은사가 없다고 해서 마귀의 일인지 하나님의 일인지 분별할 수 없는 것이 아니지요. 이 아홉 가지 은사가 지니는 속성들은 모든 성도들이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은사는 그것이 증대되어 그 일에 전념하는 직임으로 자라나고 그것을 통해서 교회에 유익을 끼칠 정도로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는 위치로 나갈 수 있는 바탕으로 장차 직임을 가지고 그 일에 전념하게 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 29~30절에서 “다 ~~이겠느냐”고 반문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기능을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 직임으로까지 성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병을 고치는 기도를 할 수 있고 실제로 병이 고침을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병 고치는 사역을 전문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해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 하지 않고 ‘내게는 그런 은사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방언에 대한 오해입니다.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은사가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으로 여기고 방언을 하려고 하지 않고 기대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방언은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에 참여하는 중요한 수단을 제공하는 기능으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깊은 기도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의 영이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이 기도하는 수단으로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방언기도입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는 수단 역시 방언기도입니다. 물론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수단들이 있습니다. 묵상과 관상인데 이 기도는 방언기도만큼 강력하지 못합니다. 방언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던 시대에는 이 기도 방법으로 주님의 깊은 기도로 들어가고 성령께서 기도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여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고 쉽지 않습니다.

묵상과 관상은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기도방법이며, 소수의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진 수도사들에게만 알려졌던 기도 방식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성도들은 오랜 세월동안 영의 기도를 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말에 생소하며, 오직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전부이며, 제도화된 교회의 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 구약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은 모두가 방언기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까닭이며, 방언을 은사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방언 역시 다른 은사들처럼 은사의 부분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해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기능으로 광범위하게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로서의 방언과 다른 성격을 지니는데 믿음의 은사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주를 시인할 수도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구원의 요소로서의 믿음과 은사로서의 믿음과 일상적인 영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주어지는 믿음은 다릅니다. 이것을 자로 긋듯이 구분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며, 명쾌한 설명 역시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로서의 믿음은 다른 은사를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한쪽 다리가 짧아서 고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기도할 때 믿음의 은사가 부족하면 환부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서 다리를 고쳐주시기를 간구할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다리를 고쳐주셔서 건강하게 다닐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대퇴골에 이상이 있어서 짧아진 것을 환상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러면 문제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퇴골이 정상으로 자리를 잡도록 명령합니다. 여기에 믿음의 은사가 있으면 그는 다리를 잡아당기면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을 선포합니다. 집고 다니던 목발을 부셔버리면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하며 하나님이 고쳐주셨다고 선포합니다.

믿음의 은사가 없으면 이런 과감해 보이는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팔이 오그라든 환자의 팔을 잡고 강제로 펴면 관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환자는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런데 전혀 개의치 않고 과감하게 팔을 찢습니다. 그러자 팔이 펴지고 오그라든 팔이 정상적으로 움직여지며 통증도 사라집니다. 이런 치유는 믿음의 은사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예언자에게 믿음의 은사가 있으면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을 과감하게 진행시킵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을 추진하고 이루어냅니다.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하는 배경에는 믿음의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은사로서의 방언은 각종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방언은 단조롭고 한 가지 톤으로 오랫동안 계속하지만 은사로서의 방언은 각종 방언을 수시로 말하게 됩니다.

방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은사에 따라서 직임에 따라서 다르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방언은 일반적인 성도들이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지적해서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듯이 모든 성도들은 방언을 함으로써 주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영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며, 성령의 탄식하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방언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과 천사와 성령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이 기도를 이해할 수 있으며, 풍성한 영의 작용을 느끼고 받아들여 응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방언을 단순히 은사로만 생각하고 하지 못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온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냥 얻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구원의 계획이 있었지만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여 고백했을 때 얻어지는 것이지 않습니까?

방언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충만을 구해야 하며, 그 가운데에서 방언으로 말하기를 사모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서로 위하여 기도하고 기름부음이 임하도록 서로 간구해줄 때 더욱 잘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사모하면서 위하여 서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물론 방언을 말하지 않고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고 각종 계시를 받을 수 있다면 그 방법도 좋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데 가장 쉬운 길을 제공해줍니다. 우리의 영이 직접적으로 기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며, 효과적이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기도하면 다른 방법 보다 더 간단하고 쉽게 영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방언을 비롯해서 모든 은사들은 은사로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은사는 그 일에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닫고 주님의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자리로 불러내어졌으며, 이를 통해서 전문 분야의 사역자로 주를 섬기게 되는 직임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와 권세와는 다른 것입니다. 누구나 구제할 수 있고, 누구나 가르칠 수 있으며, 누구나 상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 은사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 일을 취미 정도로 합니다. 은사는 취미를 벗어나 전문가가 되는 길을 여는 수단이 되며, 은사가 없으면 아무도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능력을 공급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제의 은사가 있을 때 그 사람에게는 많은 물질이 부어지게 되며, 그 일로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자신이 가진 것 일부를 드려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지만 그 일이 본업이 되다시피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의 일은 누구나 다 해야 하는 일이지만 전도의 은사가 없으면 일시적으로 끝나고 맙니다.

방언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영의 기도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없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각종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각종 방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은 방언 말하기를 힘쓰십시오. 기도할 때 방언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십시오.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더 많이 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방언에 대해서 유익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방언을 많이 함으로써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영이 강건해져야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방언은 우리 영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의 방언은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영의 기도 수단으로서의 방언이라는 점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다음 글에서 은사로서의 방언과 일반적인 기도수단으로서의 방언의 차이를 설명할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11-26 21:16:03 기도방(으)로 부터 이동되었습니다.]